올림픽 4전5기 도전을 노메달로 마감한 한국 스피드 스케이팅의 맏형 이규혁이 마침내 공식석상에서 뜨거운 눈물을 보였다.
'스케이팅 신동'으로 불리며 13살 어린 나이에 국가대표로 발탁됐고, 이후 10여년 이상을 한국 스피드 스케이팅의 간판 스타로서 숱한 국제대회에서 시상대 가장 높은 자리에 섰던 이규혁은 이영하, 배기태, 김윤만 등 척박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한국 스피드 스케이팅을 세계 무대에 알린 선배들에 이어 한국 스피드 스케이팅의 '골든 제너레이션'을 선두에서 이끌어온 주인공이다.
국가대표로 활약해온 20여년의 세월동안 크고 작은 수많은 국제대회의 메달들이 이규혁과 인연을 맺었으나 이규혁이 5차례나 러브콜을 보냈던 올림픽 메달 만큼은 이규혁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
이규혁의 생애 사실상 마지막 올림픽이었던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그가 거둔 성적은 남자 500m 15위, 1,000m 9위였다.
이규혁은 20일(한국시간) 캐나다 밴쿠버시내 하얏트호텔 코리아하우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20년에 걸친 올림픽 도전에도 불구하고 필생의 꿈이었던 올림픽 메달을 목에 걸지 못하고 올림픽 무대와 작별을 고해야 하는 상황에 대한 심경을 밝혔다.
이규혁은 이 자리에서 "이번 올림픽에 최선을 다했고 후회는 없다. 많은 분이 격려해 주셨는데 보답하지 못해 죄송스럽다. 사실 이 자리에 나오는 것도 쉽지 않았다. 조만간 마음을 추스르겠다."고 올림픽을 끝낸 소감을 밝힌 뒤 경기가 끝나고 나서 어떻게 지냈는지를 묻는 질문에 "우울하게 하면 안 될 것 같아 (기자회견을) 피하고 싶었다. 솔직히 많이 우울하다. 이렇게 얘기하기도 힘들다. 누구와 있어도 눈물이 나고... 같이 있는 분들도 울어준다. 혼자 있는 시간을 갖고 싶다."고 밝혀 5차례에 걸친 올림픽 도전에서 노메달에 그친 아픔을 쉽사리 떨쳐내기 힘든 현재의 심경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이규혁은 이어 유독 올림픽과 좋은 인연을 맺지 못한데 대한 질문이 나오자 "이번 올림픽은 완벽하게 준비했다고 생각했다. 밤에 잠이 없고 아침에 잠이 많은데 올림픽을 위해 4년 전부터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도록 연습했다. 시간 패턴을 위해 4년을 소비했고 성공적으로 적응했는데..."라고 말끝을 흐린뒤 "시합 전날 잠을 제대로 못 잤다. 500m를 하기 전에 선수로서 느낌이 있다. 내가 우승하지 못한다는 것을 어느 정도 예상했다. 안되는 것을 도전한다는 게 너무 슬펐다."고 밝혔다.
TV를 통해 그가 울먹이며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런 기자회견을 가졌다는 것 자체가 약간은 잔인한 일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규혁은 그가 지난 20년 동안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온 것처럼 쉽지 않은, 그리고 피하고 싶었던 기자회견 자리에서 말하기 쉽지 않은 이야기들을 풀어 놓았다.
이번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남녀 500m 동반우승을 차지한 모태범과 이상화는 한 목소리로 이규혁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고, 이들이 금메달을 따내는 순간 SBS 제갈성렬 해설위원은 금메달 획득 소식을 전하는 기쁨에 앞서 한때 함께 대표팀에서 한솥밥을 먹던 동료 이규혁 생각에 마이크를 내려놓은채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이규혁에 관한 기사 밑에는 수많은 네티즌들이 위로와 격려의 댓글로 이규혁의 활약에 경의를 표했고, 수많은 블로거들도 포스팅을 통해 이규혁을 칭송했다.
하지만 이규혁이 기자회견장에서 뜨거운 눈물을 쏟는 그 장면을 지켜보며 이규혁이 슬펐던 이유를 직접 듣고 그의 심경을 이해하고 그런 이유로 함께 눈시울이 붉어진 필자는 한편으로 한 사람의 팬의 입장에서 슬퍼지는 감정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그 이유는 지금 이규혁에게 그 어떤 사람의 위로나 격려도 그의 가슴속에 맺힌 응어리를 풀어주기에는 역부족일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지금 이규혁을 눈물짓게 하는 그 이유들은 온전히 이규혁 스스로 다스려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어쩌면 이제 팬들은 그가 선수가 아닌 지도자로서 그의 제자를 올림픽 시상대 맨 윗 자리에 세우는 모습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규혁이 직접 키워낸 제자가 올림픽 시상대에 서는 순간 팬들은 우선 시상대에 올라 있는 선수에게 박수갈채를 보낼테지만 그에 못지 않게 시상대 아래 그 어딘가에 제자의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을, 어쩌면 눈가에 이슬이 맺혀져 있을지도 모를 이규혁에게도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박수와 갈채를 보낼 것이다.
그 날이야 말로 이규혁이 겪고 있는 현재의 슬픔과 올림픽에 맺힌 한을 온전히 풀어내는 날이 될 것이며, 팬들이 이규혁의 눈물을 지켜보며 느꼈을 안타까움과 슬픔, 그리고 그의 슬픔을 모두 이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던 관심에 미안했던 마음의 빚을 온전히 해소하는 날이 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