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격투기가 몰락하면서 중심이 미국으로 바뀌자 PRIDE의 강자들은 미국으로 무대를 옮겼다. 허나 크로캅은 과거와는 현격한 차이가 나고 노게이라 역시 타이틀 구도에선 거리가 있으며 4대 강자 범주에 있던 히스 히링은 최근 소식이 뜸할 정도이고 조쉬 바넷은 오히려 일본의 IGF란 프로레슬링에 열을 올리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절대 강자의 명성을 갖고 있던 에밀리아넨코 표도르는 주무대를 미국으로 옮기면서 팀 실비아나 안드레 알롭스키를 잡아 명불허전이란 이야기를 듣기도 했지만 UFC와의 협상에선 다소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실력을 의심하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왔다.
그런 이유 중에 하나는 일본 격투기에 존재하는 소위 ‘떡밥 경기’ 때문이다. 손쉬운 상대들이 주어지면서 일반 팬들의 흥미를 자아내는 이런 방식의 경기는 많은 격투가들에게 쉬운 승리를 안겨주기도 했지만 그래도 표도르는 남들과 다른 뭔가가 있었다.
헤비급으로선 상대적으로 작은 체구임에도 상대의 결정타를 맞고서도 반격하는 모습으로 사이보그를 연상시켰고 얼음같은 파운딩은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으며 대중적인 카리스마가 크로캅에 비해 부족했기에 일본 격투기에선 대우가 뒤졌을 뿐, 미국으로 건너오면서 실력을 인정받아 UFC는 사상 최고의 대우를 제안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주변의 여러 여건이 복잡하면서 의외로 낮은 제안을 했던 스트라이크 포스와 계약을 했고 그마저도 매니지먼트 측에 상당부분을 주는 독특한 결정을 내렸다. 그 전에는 소속단체 어플릭션이 망하거나 보독 파이트가 최저 흥행을 기록하면서 역시 사라지는 등 다소 흥행성의 한계가 보였으나 최근 들어 슬슬 미국에서도 일반 팬들이 그에 대해 궁금해 하기 시작했고 스트라이크 포스에서도 간판주자로 밀면서 일본보단 경기 자체에 집중하는 미국 격투기에서 점점 스타로 자리매김을 해갔다.
허나 파브리시오 베흐둠에게 당한 의외의 일격은 몰락의 시작이었다. 급히 달려들다가 당한 패배이기에 그나마 실수라고 넘어갈 수 있었지만 이번 안토니오 실바에게 당한 패배는 너무도 일방적이었고 2라운드 내내 수세에 몰렸기에 더 이상 표도르를 세계 최강으로 부를 수는 없을 듯하다.
표도르가 속한 그룹은 상대편에 비해 매우 어려운 조합이었는데 이는 표도르라는 간판선수를 현재 자사의 챔피언 알리스타 오브레임, 혹은 표도르를 이겼던 베흐둠과 대결시킬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였다고 주최사에선 밝혔으니 이런 가정을 만족시키기 위해선 승리가 필수적이었다. 허나 너무도 허무하게 패배를 당하면서 표도르의 시대는 막을 내렸고 UFC가 아닌 곳에 헤비급 세계 최강이 있다는 스트라이크 포스의 주장은 설득력을 잃고 만다.
또 다른 충격은 경기 후 표도르가 말한 은퇴이다. 그간 은퇴설이 흘러나왔고 좀처럼 회복하기 어려운 패배인 걸 본다면 말로만 그치지 않을 듯하다. 뜨는 별이 있으면 지는 별도 있는 법, 본인 일생일대의 기회가 오자 바로 잡은 안토니오 실바는 경기 후 표도르에게 큰 절을 한 뒤 인터뷰에서 눈물을 흘렸고 동료와 표도르에게 감사인사를 했다. 이는 한 개인의 인생으로 본다면 감동적이지만 단체로서는 속이 탈 노릇이기도 하다. 군부대에 여성 아이돌을 부른다고 했다가 남성아이돌이 여장하고 찾아온 것처럼 흥행과는 무관한 엉뚱한 선수가 올라간 것이기 때문이다.
은퇴를 말했지만 만에 하나 번복하더라도 표도르의 시대는 저물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현대 종합격투기에서 표도르의 훈련방식이나 현재 몸 상태로는 더 이상 정상이 어렵다는 것을 증명한 경기라고 하겠다. 개인적으론 무척 아쉽지만 그런 게 세월이고 인생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