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리그 타자들이 가장 상대하기 싫어하는 투수, 나이트 매어, 빅 유닛 랜디 존슨이 22년 메이저리그 대장정의 마침표를 찍으며 은퇴를 선언했다.
존슨은 “야구경기에서 내가 더 이상 보여줄게 있다고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오랜 기간 피칭을 했기에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제 은퇴를 선언해야 할 시간을 맞았다.” 라고 말했다. 투수로써는 드물게 30살이 되어서야 피칭에 눈을 떠 40대까지 전성기를 구가한 랜디 존슨, 이 시대 가장 위대한 좌완투수가 마침내 전 세계의 야구팬들에게 안녕을 고했다.
타자들이 가장 상대하기 힘든 투수 1위
2006년 6월 7일 SI.COM은 470명의 현역타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설문내용은 “당신이 만났었던 투수중 가장 상대하기 힘들었던 투수는 누구인가?” 였다.
당시 뉴욕 양키스 소속이었던 랜디 존슨은 13.4%의 득표율로서, 2위를 차지한 로저 클레멘스의 7.9%를 거의 두 배차로 따돌리며 1위에 올랐다.
선천적 재능과 타고난 구위..
고교 시절 랜디 존슨은 야구와 농구에서 재능을 보였다. 1982년 리버모어 고등학교 소속의 랜디 존슨은 자신의 마지막 고교 선발등판경기에서 퍼펙트 경기를 기록했다. 이 해 존슨은 66이닝동안 122개의 삼진을 기록했다. 존슨은 고교 졸업시즌에 아웃카운트의 3분의 2가량을 삼진으로 기록했을 정도로 뛰어난 구위를 가지고 있었다. 존슨은 졸업후 캘리포니아 지역의 USC에 입학했다. 마크 맥과이어가 존슨과 같은 대학의 야구부원이었다. 맥과이어는 존슨의 위력적인 피칭을 보고 투수는 꿈도 꾸지 않았다고 말한바 있다. 존슨은 야구부의 스타플레이어로 활약했지만 때때로 제구력 문제를 드러냈다.
빅 유닛의 유래..
1988년 랜디 존슨의 첫 번째 팀이었던 몬트리올 엑스포스 시절이었다. 팀내 배팅 연습을 하던 중 2미터 7센티의 신인투수와 4회 도루왕과 한번의 NL 타격왕을 차지한 베테랑 팀 레인스가 외야에서 머리와 머리가 부딪히는 사고가 발생했다. 170대 초반의 작은 키를 소유한 팀 레인스는 거구의 존슨과 부딪히자마자 큰 소리로 외쳤다. “YOU'RE A BIG UNIT!” 그 이후 랜디 존슨의 닉 네임은 빅 유닛이 되었다. 아마도 메이저리그 선수들의 닉 네임중에서 가장 완벽하게 선수의 특성을 나타내는 닉네임일 것이다.
놀란 라이언과의 만남.
시애틀로 이적한 존슨은 1990년부터 1992년까지 3년 연속으로 아메리칸 리그 볼넷 1위를 기록했다. 2미터 7센티의 좌완 투수가 내려꽂는 시속 160키로에 이르는 강속구는 타자를 압도했다. 그러나 존슨의 문제는 제구력이었다. 1991년 7월 밀워키 부르워스전에서 존슨은 4이닝동안 10개의 볼넷을 기록했고 1992년 5월 볼티모어전에서도 4.1이닝동안 10개의 볼넷을 기록하며 무너졌다. 존슨을 구원한 선수는 다름 아닌 통산 탈삼진 왕 놀란 라이언이었다. 1992년 후반 존슨은 탈삼진왕 놀란 라이언과이의 만남을 통해 투수로써 한단계 도약하며 리그를 압도하는 투수로 탈바꿈한다. 존슨과의 미팅에서 라이언은 존슨의 피칭 동작의 문제점을 지적했고 존슨은 피칭동작의 교정과 함께 놀라운 제구력을 얻게 되었다. 91년 9이닝당 볼넷 6.8, 92년 6.2를 기록했었던 존슨은 라이언의 조언으로 투구폼을 교정한 다음 시즌인 1993년, 9이닝당 볼넷이 이전의 절반수준에 가까운 3.5로 떨어졌고 삼진은 300대를 돌파했다. 존슨은 93년부터 2004년 기간동안 90마일 후반대의 직구와 슬라이더를 앞세워 5회 사이영상 수상, 3회 사이영상 2위, 1회 3위등 최고의 좌완투수로 메이저 리그를 평정한다. 존슨이 라이언을 좀더 빨리 만났었다면 야구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귀가 솔깃해지는 흥미로운 가정이다.
빅 유닛의 백넘버 51번
랜디 존슨은 커리어 대부분을 백넘버 51번으로 활약했다. 1993년 랜디 존슨은 9월 26일 매리너스 경기에서 부상을 입고 은퇴를 선언한 놀란 라이언을 기리기 위해서 라이언의 백넘버 34번으로 등판했다. 랜디 존슨은 1998년 매리너스를 떠나 휴스턴을 거쳐 1999년 애리조나 디백스로 이적한다. 비록 존슨이 매리너스를 떠났지만 매리너스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고의 투수인 랜디 존슨의 백넘버 51번의 의미는 컸다. 일본프로야구에서 51번을 사용했던 이치로 스즈키는 시애틀 매리너스와 계약한 이후 랜디 존슨에게 ‘절대로 51번의 명예를 훼손시키지 않겠다’ 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이치로는 데뷔 시즌인 2001년 AL MVP를 차지하며 존슨과 한 자신의 약속을 지켰다.
2005년부터 2006년까지 양키스 소속의 랜디 존슨은 백넘버 41번을 달아야만 했다. 양키스 프랜차이즈 스타인 버니 윌리암스 역시 51번의 주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존슨은 그 당시 자신의 나이였던 41번을 선택했다.
2007년 애리조나로 복귀한 존슨은 다시 자신의 번호인 51번을 사용했다. 2009년 존슨이 자신의 커리어 마지막 팀인 샌프란시스코 쟈이언트와 계약했을 때 51번은 투수 노아 로우리가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로우리가 대투수인 랜디 존슨에게 51번을 양보함으로써 존슨은 자신의 마지막 팀에서 51번을 유지할 수 있었다.
2001년 월드시리즈 우승과 MVP
랜디 존슨은 커트 실링과 함께 2001년 신생팀 아리조나 디백스를 이끌고 거함 양키스를 침몰시키며 월드 시리즈 우승의 일등 공신이 되었다. 월드 시리즈 2번의 선발등판경기에서 2승 무패를 기록한 존슨은 마지막 7차전에서 8회 초 마무리 투수로 등판하여 1.1 이닝동안 무실점으로 양키스 타선을 잠재우며 9회말 대역전극의 발판을 마련했다. 루이스 곤잘레스의 끝내기 안타로 김병현을 벼랑끝에서 구원해준 월드시리즈 7차전의 승리투수는 랜디 존슨이 되었다. 시리즈 3승 무패를 기록한 존슨은 실링과 월드시리즈 공동 MVP에 선정되었다. 존슨은 자신의 커리어에서 가장 잊지 못할 순간과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순간을 2001년 월드 시리즈 우승이라고 말했다.
22년의 메이저리그 대장정의 마침표를 찍은 46살의 존슨은 향후 코치가 될 계획임을 밝혔다. 존슨은 아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에서 1년간 스탭으로 활동하게 된다.
“내가 이렇게 오랜 기간동안 공을 던질 수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다. 오랜 기간 공을 던진 나는 축복받은 선수였다.”
축복받은 자는 랜디 존슨이 아니라 그의 압도적인 피칭을 보아온 야구팬이었다. 존슨은 28살부터 40살 기간동안 10번(리그이동)이나 다름없는 9번의 탈삼진 1위를 기록했다. 이 기간동안 6번의 300 K 시즌을 기록한 존슨은 야구역사에서 9이닝당 가장 많은 삼진을 기록한 투수 1위로, 가장 많은 삼진을 기록한 좌완투수로 커리어를 마쳤다. 38살에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고 40살에 퍼펙트 경기의 위업을 달성한 투수를 본 것은 야구팬들의 행운이었다. 전설중의 전설이 야구사의 한 막을 장식하며 퇴장했다. 앞으로 랜디 존슨 같은 투수를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