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레슬링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흑백TV 시절 김일, 장영철, 천규덕의 간판이 있었고 그 뒤를 박송남, 김덕 같은 차세대가 받치고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소년들을 흥분시킨 여건부가 있었다. 요새는 레이 미스테리오가 경량급의 간판이라면 과거 미국에선 대니 호지란 아마추어 레슬러 출신 프로레슬러가 있었다. 일본에선 타이거 마스크나 다이너마이트 키드가 한 시대를 풍미했고 페가수스 키드, 블랙 타이거 등이 있었다면 전시대엔 여건부 선수가 있었다.
키가 작으나 무척 빠른 동작으로 유명했던 여건부 선수는 최근에는 악역 매니저나 단체의 회장 역할로 일본에서 여전히 활약했으며 후배들의 존경을 많이 받고 있었다. 프로레슬링 업계에서도 금전적인 문제에서 후배들을 배려하면 좋은 평가를 받고 착복을 하거나 급여가 짜면 문제가 되곤 하는데 여건부 선수는 과거와 같지 않은 업계 분위기를 일신하고 싶어서 많은 노력을 한 선수로 꼽힌다.
우리에겐 재일교포이고 트레이드마크인 '알밤 까기'가 인상적이지만 일본에선 빠른 몸놀림을 기억하는 올드팬들, 그리고 업계에선 믿을 수 있는 선배로 꼽혔다. 이에 그의 운명에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특히 적잖은 아쉬움이 있는 듯 하다.
일본 명 호시노 칸타로로 불린 여건부 선수는 1943년생인 태어나 고교시절 복싱을 계속 수련했으나 신체적인 여건상 팔이 길지 않던 터라 한계를 절감했다. 당시 역도산이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걸 확인한 여건부는 복싱에서 종목을 바꿔서 프로레슬링에 도전했고 만 18세인 1961년 데뷔한다.
작지만 빠르단 평가가 따랐으며 초창기엔 야마모토 코테츠와 태그팀을 이뤄서 활약했고 둘은 1967년 1월 '야마하 브라더스'라는 태그팀으로 미국 원정을 떠났다. 운명의 장난일까, 금년 8월 운명을 달리한 옛 파트너 야마모토 코테츠를 따라서 3개월 뒤에 여건부 선수도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가고 말았다.
1970년대엔 싱글 선수로서 자리매김을 하면서 안토니오 이노끼와 따로, 혹은 같이 활약하기도 했고 그의 단체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번성에도 큰 역할을 담당했다. 이 시기에 우리나라에서도 경기하면서 빠른 몸놀림과 알밤까기로 많은 인기를 끌었다. 경량급의 간판스타 중 하나였다가 타이거 마스크의 시대가 오자 그에게 조명을 받는 기회를 넘겨주면서 태그팀을 이뤄서 외국인들과 상대했는데, 상대 선수들은 배울 점이 많은 선배로 꼽았다고 한다.
수많은 타이틀을 획득했으나 52세인 1995년 은퇴한 뒤 행정 일을 맡았고 방송에선 악당 매니저로 나오기도 했다. 이후 신일본 프로레슬링이 위기에 빠지자 단체의 회장도 맡으면서 엄청난 영향력을 과시했고 놀랍게도 2008년 12월 22일 65세의 나이에 다시 링으로 돌아와서 '게도' 선수와 대결을 갖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은 이길 수 없는 법, 2009년 4월 뇌경색 판정이 나왔고 뇌손상의 정도가 컸던지 보행과 언어능력을 잃어버리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폐렴증상이 나와서 생사를 오갔고 결국 1년 7개월 뒤인 2010년 11월 25일,, 폐렴 합병증으로 인해 67세를 일기로 운명을 달리한 것이다.
그가 떠난 뒤 많은 후배들이 아쉬움을 토로했다. 최근 일본 프로레슬링 인기가 많이 떨어지자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자고 후배들을 독려한 선배였고 후배들을 많이 배려했기에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에게도 프로레슬러라 하면 바로 떠오르는 여건부 선수가 이렇게 떠난 것이 참으로 아쉽게 느껴진다.
<사진=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