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를 위해 승부를 사전에 합의하는 프로레슬링의 특징상 기존에 자리 잡은 선배가 떠오르는 후배에게 순순히 자리를 내주지 않는 경우는 적지 않다. 헐크 호건은 친구들과 더불어서 후배들을 억누르기로 유명했고 그와 비슷한 성향의 캐빈 내쉬는 권력 투쟁에서 이겨서 호건을 밀어내고 WCW를 장악했으나 그의 성공과 단체의 몰락은 궤를 같이하면서 사리사욕만을 앞세웠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패하게 되는 경우에도 진심이 안 담기면 가관이다. 로드 워리어스처럼 상대의 마지막 기술을 맞고 바로 일어서면서 체면을 구기게 만드는 선배도 있고 일부는 격이 안 맞는다면서 아예 대립하는 스토리를 거부하기도 한다. 사전에 합의한 걸 선보이기에 정해진 것만 표현하는 듯 하나 합의까지의 과정이나 이후 결과는 의도대로 가지 않는 경우가 많다. 과거 숀 마이클스, 스캇 홀이나 캐빈 내쉬는 의도대로 연출하지 않기로 유명했다. 이들은 팬들의 인기가 가장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자기들만 뜨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상대를 바보로 만들고 자신들을 반항적인 이미지로 포장하는 술수를 택했다.
그나마 WWE 같이 프로모터의 파워가 강한 단체에선 이렇게 하는 경우 제재가 크지만 1990년대 중반 빈스 맥맨이 각종 소송에 시달릴 당시엔 선수들이 독자행동을 많이 했고 WCW 같이 대표가 자주 바뀐 경우 선수들의 알력다툼은 상상을 초월했다. 현재 WWE도 친분에 따른 특혜가 없진 않지만 과거 WCW에 비해서는 훨씬 낫다. 권력층의 트리플 H와 인간적인 갈등을 갖고 있는 브렛 하트도 최근 복귀 후 만족감을 표현했고 별다른 피해를 본 게 없으니까.
최근 WWE는 주주총회에서 말한 것처럼 리빌딩 작업 중이다. 주력 선수인 바티스타, 크리스 제리코 등이 이탈했고 숀 마이클스는 아예 은퇴했다. 이 자리에 셰이머스, 웨이드 배럿, 더 미즈, 존 모리슨 등이 올라섰고 알베르토 델 리오를 전략적으로 키우면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이런 시기에 크리스 제리코의 부재가 아쉽다. 그는 선배로서 후배에게 패할 때 제대로 배려하는 몇 안 되는 선수에 꼽힌다. 릭 플레어가 후배들에게 잘 패하기로 유명하지만 배려라기보다 호건이나 내쉬 같은 정치적인 이들에게 머리싸움에서 밀려 어쩔 수 없던 경우가 많았다. 플레어는 인기 덕분에 요즘도 계속 활약 중이고 60대가 넘었으니 후배들에게 패하는 것도 별 불만이 없지만 15년 전 이런 마인드는 아니었던 것이다. 당시 얼마나 위태로웠냐면 중간급인 스티비 레이나 스캇 노턴 보다 연봉이 낮았고 그마저도 내쉬 같은 이들은 플레어를 퇴출시켜서 나눠 갖자는 이야기를 했을 정도였다.
제리코는 그와 달리 안정적인 상황에서도 코피 킹스턴, 에번 본 등의 후배의 마지막 기술을 받으면서 패했고 패배 뒤 아무 일도 아닌 듯 일어난 선배들과 달리 억울한 표정을 지으면서 후배들의 약진을 도와줬다. 물론 그런 희생이 작가들의 변심으로 최근엔 별 의미 없이 되었지만 적어도 과거 본인을 가로막던 선배들과는 다른 양상을 보였던 건 맞다.
자유로운 영혼의 제리코는 최근 방송에선 오턴의 사커 킥을 맞고 실신한 걸로 빠진 뒤 본인의 밴드 ‘포지’에서 활동 중이다. 그의 부재로 인해 선수진의 중량감이 줄어들기도 했지만 자신이 원하는 때 원하는 일을 하면서 자서전이 또 다시 낼 정도로 여러 가지 일에 열정적이다.
물론 후배들을 위해 길을 내주는 선배가 제리코 하나만은 아니겠지만 희생정신의 발로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순응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와 달리 후배들을 약진시키고 본인도 자기의 길을 잘 가는 상생의 길을 걷는 크리스 제리코는 절실하게 필요한 선수가 아닌가 싶다. 그의 부재가 꽤나 아쉽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