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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칼럼 해설위원/정효웅의 간접 프리킥

잊혀지는 이름들을 기억하는 시간



[정효웅의 간접 프리킥]

일본 드라마 사상 최고의 시청률 기록을 보유한 히어로(Hero)”라는 드라마 마지막회의 한 장면이다. 남녀주인공이 애정을 확인하는 장면인데 여주인공인 아마미야 마이코(마츠 다카코 분)가 남주인공 쿠리우 코헤이(키무라 타쿠야 분)에게 월드컵에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자(이 마지막회는 2001년 3월 19 방영되었다.) 쿠리우는 이전의 약속대로 카메룬 축구국가대표선수 11명의 이름을 외우면 같이 가겠다고 한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BGM과 함께 아마미야는 피에르 은잔카(Pierre Njanka)부터 시작해서 당시 J리그에서 활약하던 스트라이커 파트릭 음보마(Patrick Mboma)까지 11명의 선수 이름을 어렵게 어렵게 한 명씩 부르는데 성공한다.

 

11명의 선수 이름을 부르는 중간쯤, 한 선수의 이름을 잊어버린 아마미야는 잠시 생각을 가다듬고 기억해낸 그 선수의 이름을 간신히 외치며 왜 선수들의 이름이 다 이 모양이야!”라고 푸념을 한다. 이름을 떠올리기 힘들었던 이 선수. 그의 얘기다.

 

마르크-비비앙 푀(Marc-Vivien Foé). 2003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에 참가한 카메룬 국가대표 미드필더인 푀는, 6 27일 프랑스 리옹의 스타드 제를랑에 열린 카메룬과 콜롬비아의 준결승전에 출전하여 후반 26분 홀로 쓰러진 후 결국 다시는 깨어나지 못하며 모두의 곁을 떠나고 만다. 올림피크 리옹 소속으로 2000년부터 2002년까지 2년간 홈구장으로 활약했던 정든 그 장소에서.

 

같은 날 열린 또다른 4강전 프랑스와 터키의 경기에서 골을 성공시킨 티에리 앙리는 로베르 피레스를 비롯한 프랑스의 동료들과 함께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푀를 추모한다. 축구 세계의 모든 이들이 푀의 비극적인 죽음을 애도하였다. 올림피크 리옹은 푀의 등번호였던 17번을 영구결번하였고, 최후의 순간 푀의 소속팀인 프리미어리그의 맨체스터 시티 역시 그의 번호 23번을 영원히 간직하기로 결정하였다.

 

사실, 올해도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이 열려 브라질의 우승으로 막이 내린 바 있다. 그렇지만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이 대회는 내년 FIFA 월드컵의 안전한 개최를 위한 사전 준비작업의 성격이 강하게 느껴지기도 하였지만, 이 대회 중에 비극을 맞이한 푀를 기념하는 특별한 시간은 없는 것으로 보였다. 불과 6년 전에 이 대회에서 벌어진 일이었는데도 말이다. 아마미야의 기억뿐이 아니고 많은 이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일까.

 

그 이후 생각을 계속 담아두고 있는 과정에, 며칠 전인 7 31, 보비 롭슨 경의 부고가 있었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당시 잉글랜드의 4강을 이끌었고 PSV아인트호벤, 스포르팅 리스본, FC포르투, FC바르셀로나, 뉴캐슬 유나이티드 등 유럽을 넘나드는 위대한 감독의 업적을 남긴 그가 오랜 암투병 끝에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 것이다. (2003년 뉴캐슬을 프리미어리그 3위로 이끌었던 롭슨 경의 부고는 강등에 울었던 뉴캐슬의 팬들에게 찾아온 또 하나의 슬픔이다.) 한창 진행 중인 2009 피스컵 안달루시아 대회는 그를 추모하는 분위기의 광장이 되었고, 그의 라이벌이었던 알렉스 퍼거슨 경이나 그의 제자로 볼 수 있는 조제 무리뉴, 그리고 UEFA의 수장 미셸 플라니티의 추모를 비롯하여 유럽 축구계는 숙연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에 대한 추모 열기는 지금은 뜨겁지만, 위대한 전설인 보비 롭슨 경이라 할지라도, 시간이 점점 흐를수록 사람들의 기억은 점점 흐려질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이번 피스컵의 개최지 중 하나인 세비야의 라몬 산체스 피스후안 경기장은 대회 기간 내내 바로 그 곳에서 2007년 8월 28 경기 중 숨을 거둔 안토니오 푸에르타를 위한 추모 행렬이 길게 이어지기도 하였지만, 한국에서 월드컵이 열린 바로 그 2002 4월 속초에서 FA컵 경기 도중 쓰러져 제대로 응급처치도 받지 못하고 꽃다운 젊은 나이에 생을 마친 당시 숭실대 소속의 도연 선수의 이름을 기억하는 축구팬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한 공중파 방송사가 2002년 월드컵이 끝난 얼마 후, 형이 못다 이룬 꿈을 이어가는 그 동생을 잠시 조명한 것이 기억이 나긴 하지만 말이다. 한국 축구에서, 김도연의 비극은 너무나 쉽게 잊혀져만 가고 있다.

 

축구나 스포츠 이런 걸 모두 다 떠나서, 가끔 한 번쯤은, 잠시나마, 우리 곁을 떠나 잊혀지는 이름을 기억하는 시간을 갖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