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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칼럼 해설위원/성민수 라스트라운드

[성민수의 라스트 라운드] 하강의 미학에 대해


한때 우리나라 격투기 팬들은 표도르, 크로캅, 노게이라, 바넷을 헤비급 4천왕이라 부르면서 숭앙했다. 하지만 몇 년 뒤 그 평가는 철저하게 달라진다. 생소한 단체 스트라이크 포스에 간 표도르는 비겁자라고 폄하되며 몇 차례 졸전을 펼친 크로캅은 인터넷상의 웃음거리로 전락했다. 노게이라는 이젠 화제에서도 벗어났으며 바넷은 단체파괴범이란 황당한 별명까지 붙었다. 도핑양성반응은 바넷 만의 일도 아니며 단체가 사라진 건 바넷의 책임이 아니라 적자누적으로 어차피 그렇게 될 운명이었을 뿐인데도.

최홍만은 어떤가? 국민적 영웅이기도 했지만 연이어 부진한 모습을 보이자 인격모독에 가까운 비난을 받았고 그런 상처 때문인지 최근엔 국내보단 일본 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물론 그의 말 바꾸기는 아쉬운 면이 많았지만. 재일교포의 아픔을 알려준 추성훈은 또 다른 영웅으로 추앙받았지만 일부는 한일 양국에서 잇속만 챙기는 박쥐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왜 이렇게 쉽게 평가가 바뀔까? 격투가라면 반드시 승리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팬들과 좀 더 조회수를 올리기 위해서 자극적인 제목을 붙이는 언론의 합작품이 아닌가 싶다.

물론 선수들이 원인제공을 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최홍만과 크로캅은 부진했고 격투기 이외의 일들이 많았으며 바넷은 메인이벤트를 앞두고 약물 양성반응이 나왔다. 표도르는 최고 단체 UFC에서 강자들과 싸우는 길을 피했고 추성훈의 수많은 외부활동은 팬들에게 거슬릴 정도였는지도 모르겠다. 허나 격투가는 항상 이길 수도 없고 UFC만이 격투기 단체도 아니며 약물 양성반응은 조쉬 바넷이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외부활동은 자기가 알아서 조절하면서 결과에 대해선 본인이 책임지면 그만이다. 어차피 추성훈도 앞으로 격투기를 할 시간이 많지 않으니 미리 개인의 잇속을 챙길 필요도 있겠고.

격투가는 항상 최고의 상대와의 대결만을 준비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건 착각이다. 이들도 어차피 격투기를 통해서 자신의 영리활동을 하는 것이며 능력이 있을 때 최대한 뭔가를 남기려고 하는 남들과 같은 사람들일 뿐이다. 그런 와중에 외부의 제의에 솔깃하게 되기도 하고 오판에 빠질 수도 있겠지만.

사람이란 영원할 수가 없다. 항상 잘 할 수도 없으며 한 개인이 영구적으로 군림한다고 생각하면 너무 인생이 재미없어진다. 일이란 잘 되는 때가 있으면 안 풀리는 순간도 있다. 굳이 무슨 법칙을 붙이지 않더라도 살면서 자연스럽게 체득하는 이 원리는 선수들에게도 소급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혹자에겐 불행한 일이 다른 이에겐 행운이 될 수도 있는 것이겠지만. 오르는 즐거움이 있으면 내려가는 길도 피할 수 없는 법, 이젠 하강의 미학도 고민해야 할 시기가 아닌가 싶다.

예술가들도 꽤나 심한 기복을 겪는 사람들이지만 어떤 이들은 일생에서의 부침(浮沈)을 더 나은 성과를 위한 연료로 승화시키기도 한다. 그런 것들이 인생의 묘미라고도 할 수 있겠고.

예술과 격투기, 혹은 스포츠가 다르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고난을 딛고서 성과를 이룬 선수나 역경을 이긴 예술가나 별반 다르진 않다. 이들의 성취는 오히려 더 큰 감동을 주고 그들에게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이들에겐 더 큰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렇다면 좀 더 인내를 갖고 애정을 주는 건 어떨까?

계속 희망을 갖다가 상처받는 게 싫기에 자기 방어의 기제로 비판을 할 수도 있겠다. 이솝 우화에서 포도를 먹으려다가 갖지 못한 여우가 ‘저 포도는 분명히 실거야.’라고 했듯 괜히 기대를 갖다가 무너지는 꼴이 싫어서 그렇게 폄하할 개연성도 분명 있다.

그렇다면 이전에 주었던 기쁨만으로도 만족하는 건 어떨까? 화무십일홍이라고 했다. 어차피 우리는 영원할 수도 없고 지구의 역사와 비교하면 한 인간의 일생은 하루 중 1초도 되지 않는 짧은 순간이다. 동시대에 사는 사람들 중에서 잊지 못할 추억을 남긴 그들에게 언제나 강하기만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타 스포츠에선 옛 유명 스타들을 예우하는 걸 심심치 않게 보게 된다. 그들은 은퇴를 앞둔 시점의 부진이 아니라 전성기의 화려함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젠 격투가들에게 승리만이 강요되는 시스템이 아니라 항상 잘 할 수만은 없다는 하강의 미학을 소급시키는 것이 어떨까?